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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네 이야기/우리가족 수필방

고양이와 울타리




고양이와 울타리

 

대봉도서관 수필창작교실  1기  이 장 희

 

 담 대신 나무나 풀 따위로 엮어 경계 지은 것을 울타리로 안다. 담장과 좀 다른 의미로 쓰이지만 넓게는 일정한 영역을 구획 짓는다는 뜻에서 담장도 울타리가 아니겠는가. 섬이나 산골 집촌에는 지금도 생활 울타리인 돌담들이 향수를 자아내며 고풍과 자연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하나같이 엇비슷한 돌담 때문에 혼미해 했던 어린 시절 친척집을 찾아다닌 추억이 아련한데 도시의 양옥은 도둑이 못 들게 담장을 높이고 위에 삐쭉삐쭉한 창을 꽂아 위화감을 느꼈던 적도 있었다. 밥술깨나 먹고 산다는 집은 담 위에 유리조각을 꽂아 경각심을 주는 것이 그때의 유행이었다. 차츰 낮아지고 우아하게 울타리가 변해 담장 허물기란 말을 들은 지도 오래 되었다. 건물의 경제적 가치를 높였고 친근한 행정 분위기, 쾌적한 환경을 가져다주었으며 주민 휴식공간과 체육시설을 제공했다. 이웃 간의 벽을 허물어 소통의 장을 마련함으로써 도심을 재창조한 수범사업이라 자랑한다. 없을수록 더 편리한 게 울타리라면 애써 막는 담장이야말로 필요악일지도 모른다.

 울타리로 남과의 소유를 분명히 하고 개인의 프라이버시 유지도 된다. 적이나 침입자로부터 방어하고 태풍 같은 기상변화에 대처할 수 있다. 울타리 없이는 위험에 노출돼 사람과 재물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다. 피해도 막고 이웃과 행인을 보호하기도 한다. 개의 목에 묶인 쇠줄이나 대문의 맹견조심 경고판이 그렇다. 담을 잘 쌓아야 이웃 간에 의가 좋은 법이란 옛말도 있다. 얼마 전에는 울타리를 침범하거나 울타리 밖으로 쫓아낸 상대적인 사건이 있었다. 산에서 내려온 멧돼지가 과수원을 습격해 다 익은 사과와 나무를 온통 절단 냈던 일과, 서울시에서 역사건물 내 노숙자들의 강제퇴거를 확정했던 일이다. 인간이 만든 울타리의 한계이고 모순이며 역설이다. 수돗물 공급하는 상수원이나 생산 공장 울타리는 아무나 못 들어오도록 막는 게 주된 목적이라면 닭이나 오리 울타리는 교도소 담장처럼 밖으로 못 나가도록 막는 울타리이다.

 우리집은 평범하고 높지 않은 담장이 있다. 대문 아래쪽엔 신발이 들락날락 할만치 훤히 뚫려 있다. 그런데 이 공간이 동네 강아지나 고양이가 마음 놓고 출몰하는 통로가 될 줄은 예기치 못했다. 집 주인 눈치 볼 것 없이 냅다 달려 단숨에 이층 계단이나 옥상까지 오르내리는 것이 일쑤였다. 어둑해진 저녁 무렵 갑자기 맞닥뜨리면 어른도 등골이 섬뜩해 소리 지를 판이었다. 이웃의 반려동물인데 싶어 몽둥이질 할 수도 포획할 수도 없다. 출입을 못하도록 긴 널빤지로 사시사철 가려 놓아야 했다. 좋아하는 그림 중에 조선시대 김득신의 ‘파적’이 생각난다. 순간적인 상황 묘사가 생동감 있고 해학적 표현으로 인간미가 물씬 풍기는 이 그림에서도 고양이는 병아리를 물고 달아나는 개구쟁이 같은 성가신 존재이지만 미움의 대상은 전혀 아니었다. 이집트인들이 리비아 고양이를 사육 순화시켜 가축으로 키우기 시작한 그 옛날엔 나처럼 남의 고양이 뒤치다꺼리까지 신경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통로를 막아서 문제는 해결됐다 싶었는데 강아지와 달리 고양이는 태생이 야생임을 실감했다. 담장 위를 마음대로 내달리며 이집 저집을 날다람쥐처럼 재빠르게 쏘다니는 것이다. 애완동물 기르기 유행으로 애견센터가 동네마다 들어차고 페트신드롬이란 신조어가 생긴 지도 오래되니 길고양이도 한두 마리가 아닌 듯 했다. 쥐 잡을 일도 없어 만날 놀고먹던 녀석들이라 주인이 한번 버리고 나면 천하의 백수요, 노숙 고양이신세다. 할일 없고 배고픈 녀석은 으레 동네 모퉁이의 쓰레기봉투를 뒤지곤 한다. 분리수거에 게으른 사람들이 먹고는 제멋대로 버린 음식물이 그놈들의 밥이다. 형편이 안 되면 아예 기르질 말아야지 귀여움에 반해 가족처럼 돌보며 동물애호가인체 행세하다가 물색없이 헌신짝 버리듯 팽개친 결과이리라.

천재 시인 고월(古月)은 꽃가루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서 고운 봄의 향기와 금방울 같이 동그란 고양이 눈에서 미친 봄의 불길을 간파하였다. 고요히 다문 고양이 입술에서는 포근한 봄 졸음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수염에서도 푸른 봄의 생기를 노래했었다. 이처럼 봄과 고양이의 유사점을 하나하나 붙잡아 하나로 엮은 독특한 비유가 뛰어나 널리 애송되었다. 귀엽고 깜찍해서 애완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고양이지만 난 아직 길러본 적이 없다. 창문 너머에서 들리는 껄끄러운 울음소리는 얼핏 아이 울음 같고 들짐승 소리를 닮아 단잠을 설치게 했다. 앙증맞고 여린 ‘야옹’ 소리로만 고양이를 기억한다면 요즘 사람이 아니다. 이제 자주 들어서 익숙한 한밤중에 내지르는 괴성같은 그 울음소리 참으로 싫었다.

 무단 침입하는 녀석들 때문에 고양이가 거북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어제오늘이 아니다. 대지의 절반은 마당으로 보잘것없는 꽃나무와 푸성귀 쪼금 외엔 나무 몇 그루 서있는 풀밭이다. 웬 고양이가 어디서 뭘 먹었는지 나무 밑에 쓰러져있다는 아내의 말에 당장 치울 준비를 해갔다. 숨진 그놈 몸뚱이를 집어 비닐봉투에 담는 간단한 일이었지만 크고 뻣뻣하게 자빠져 누운 것이 잠시나마 께름칙했던 그 일이 발단이었다. 그 후로 또 다른 녀석들이 수시로 제집인양 와서는 평평한 빈터다 싶으면 떡하니 누워있었다. 만사가 귀찮은지 겁이 없는 건지 가라고 손짓해도 어디 한번 쫓아내보라는 듯 꿈쩍 않는다. 잡을 듯이 빗자루를 들고 던지는 시늉해가며 고함지르면 그제야 마지못해 ‘알았어, 알았다니까’라고 대꾸하듯 피한다. 한두 마리 고양이 때문에 성을 쌓듯 담을 더 튼튼히 할 수도 없고 난감한 일이었다.

 고양이란 놈이 원수처럼 여겨져 혐오 대상으로 낙인찍은 것은 건물 위에 대놓고 오물을 싸질러 놓고 간 후부터였다. 옥상에 큰 두리함지박만한 합성고무 화분이 있는데 도라지를 키우고 있다. 그 보다 작은 옆 화분에도 각각 파프리카와 가지모종이 자란다. 얼마 전부터 녀석이 날름 올라와서는 실례를 하고 가버리는 통에 대책에 골몰한 것도 셀 수가 없다. 행여나 싶어 가시 돋은 나뭇가지를 잘라 얹어 놓아 봐도 잎이 좀 시들었다 싶으면 용케 앉았다 갔다. 거듭하다 보면 이력이 나는지 눕혀놓던 나뭇가지를 총총 수직으로 꽂아 보았다. 며칠 더 견딘다싶더니 뿌리 없이 꽂아놓은 버티개는 역시 시들고 힘도 없었다. 한번은 그놈과 마주쳤다. 잘 만났다며 죽일 듯 달려드니 스치며 비호같이 삼십육계 놓았다. 계단에서 아래를 살폈을 때는 마당을 거쳐 이미 담 위에 서 있었다. 돌아다니는 놈이다 보니 지금 보는 저 녀석이 애먹이던 그놈인지, 밤중에 울던 그 놈이 저 녀석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왜 넓고 말끔히 정리된 우리 옥상에 일을 저지르는지 모르겠다.

 오랜 궁리 끝에 드디어 묘안이 떠올랐다. 아내는 번쩍이는 내 아이디어에 반신반의 했다. 시래기도 말리고 공기창 가리개로도 쓰던 헌 철망꾸러미가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펴고 접고 말아서 도라지 심은 두리함지박 화분 주위를 높고 둥글게 울타리처럼 삥 둘러 세웠다. 뭔가 효과 있을 것 같은 조짐이 보였다. 건드리면 휘청거려서 그놈이 쉽사리 앉을 수 없으니 올라서지 못할 것이고, 뛰어넘자니 나오기가 거북해 엄두를 내지 못하는가 싶었다. 됐다는 확신이 섰지만 옆의 다른 화분은 그냥 두었다. 물이 쉬 마르지 않도록 아내가 나무줄기 주위에 비닐로 대충 덮어 싸둔 뒤로는 고양이가 앉았던 흔적이 안 보였기 때문이다.

녀석의 해코지는 끈질겼다. 비닐 바닥도 풀밭도 아닌 흙바닥에만 골라 앉는다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방심하고 지내던 어느 날 범하지 않던 비닐로 덮인 화분에도 기어코 귀신같이 용변을 본 흔적이 있었다. 급히 비닐봉지와 장갑, 나뭇가지를 준비했다. 코를 움켜쥐고 은행 알이라도 줍듯 하나하나 쓸어 담았다. 파리 떼와 악취의 고통을 감내하고서야 문제의 화분도 철망 안으로 들여 놓았다. 드디어 제대로 대처했다 싶더니 아내도 흡족해하는 눈치였다. 오랫동안 신경 쓰이던 고양이 퇴치작전은 이렇게 작은 울타리 치는 일로 끝장나기를 자신해 본다. 멀리 다른 데로 처소를 옮겼는지 보름이 지나도록 눈에 띄지 않았다. 마음같이 성공으로 결말이 난다면 나도 언젠가는 가까이 두고 보며 고양이한테서 봄 향기와 봄 졸음을 느낄 것이고, 봄의 불길이며 봄의 생기까지도 마음껏 노래할 수 있는 날도 머잖아 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