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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네 이야기/우리가족 수필방

즉견(卽見)의 추억


즉견(卽見)의 추억

16기 이 장 희

   책장 한 칸을 차지한 전시회 圖錄들을 정리하다 보니 문득 스치는 추억이 아련하다. 중학교 때 선생님과 선생님 때문에 알게 된 S선배이다. 베풀어 주신 은혜가 너무 사무쳐 한량없지만 워낙 무심한 탓으로 그저 잊을 만할 때 한번 찾아뵙곤 했던 선생님께 개인전 화랑에서 물감 한 두 번 전해 드린 적이 있을 뿐이다. 딱 한 해 가르쳐주시고 가셨어도 평생의 스승이신 선생님이다. 언젠가 한 번 찾아뵌 김에 S 선배에 대한 근황을 여쭈었더니 "외국의 교환교수로 가 있지 아마"라고 하시던 말씀이 새삼 떠올랐다. 올 추석엔 선생님께 한번 들려 그간 적조했던 불찰에 용서를 구하고 그 선배 이야기를 화두로 삼아 인사드릴까 싶은 생각이다.

 처음엔 웬 낯선 청년인가 했었다. 점심 때 미술실에 석고상을 비스듬히 바라보며 화판 얹은 삼각대 앞에 한 젊은이가 앉아 있었다. 해맑은 피부에 검정 테 안경의 이목구비가 수려했다. 한참 위의 동문 선배로 서울서 공부하는 중이라고 선생님께서 소개하셨다. 그는 대구에서 공부해 서울 명문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있는 착실한 선배라고. 호기심에 친구들과 그림에 관해 이것저것 물어보던 일이 생각난다. 십년 안팎의 선배 중에 알만한 화가 분들이 더러 있어 우리는 그 점을 영광스런 전통으로 여기고 흠모해 마지않았다. 그런 전통을 잇겠다고 그림 연습에 몰두했다. 삼년을 하루같이 화판을 겨드랑에 끼고 다녀 그곳은 항상 풀빛 물감으로 배어 있었던 중학생 시절이었다.

 가장 친했던 친구는 서울로 가버리고 그림 친구들이 졸업과 동시에 뿔뿔이 흩어졌다. 홀로 입학한 곳이 바로 그 선배가 다녔던 학교라 고교까지 그의 후배가 된 것이다. 하루는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진학에 대한 고민은 쌓이고 그럴 즈음 문득 그 선배의 도움을 청해야겠다는 생각이 스쳐 갔다. 아직도 대학 재학 중이란 소문만 믿고 무작정 입학시험에 대한 궁금증을 두서없이 이것저것 묻는 편지를 썼다. 졸업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받을 수 있겠지 하고 대학교 주소와 학과, 성명만 봉투에 적어 부쳤다. 제발 후배의 간절한 편지를 받고 진로에 대한 시원한 답변을 해주길 기대하면서.

 스무 날쯤 지나서인가 기다리던 답장이 왔다. 노란 편지봉투 겉에는 내 이름 밑에 생소한 ‘즉견(卽見)’이란 용어의 매끄러운 행서체가 선배의 고아한 품격을 드러내듯 한 펜글씨였다. 졸업전시회 준비로 바빠 답장이 늦었다는 양해의 서두에 이어, 실기시험에 자주 나오는 소재는 무엇이며 아무데서나 들을 수 없는 입시정보가 알토란처럼 담겨 있었다. 교양과정 전공별 과정이니 생소한 교과목과 용어들에 대해서 간략하면서 알뜰한 설명도 있었다. 학생생활 전반에 걸쳐 한문을 섞어 안내했다. 지금은 입시정보 인쇄물이 흔해빠져 쉽게 볼 수 있지만 정성들여 필담으로 가르쳐 주신 그 고마움을 수치로 환산하기도 어렵고 말글로 형용한다면 어떤 미사여구로도 표현할 길이 없다. 더욱이 정성껏 써내려간 필체는 누구보다 날렵하고 지체 높은, 참으로 명필이 따로 없다싶은 유려한 글씨였었다.

  편지 잘 받았다는 답장을 하고 실기와 학과공부에 매진했다. 난관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지만 가정 형편상 등록금 덜 드는 국립대학을 택했다. 입학만 하면 모든 어려움이 다 해결될 것으로 믿고 그 선배 뒤를 따르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한 번 만에 내가 오르기엔 너무 높은 산이었다. 딱 열 사람 안에 들지 못했다. 학비감면을 위해 일하던 도서관의 아르바이트도, 시오리 길 걸어 반값 미만의 교습비로 다닌 실기공부의 보람도 나에겐 너무 버겁고 무거운 짐 보따리였다.

  선생님으로부터 S 선배의 안부를 들은 지 겨우 한두 해 쯤 지났을까 그런 어느 날이었다. 우리 고장에서 열리는 전시회들을 훑어보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악’하고 소리 지를 뻔 했다. 날벼락 같은 일이 현실이었다. 문화예술회관 전시회 일정에 그 선배의 유작전이 계획되어 있지 않는가. 아니 이럴 수가 있나? 가슴은 쿵쿵 뛰었다. 선생님은 알고 계실까? 아시겠지, 아니 모르시는 게 약이겠지. 어릴 적 기억으로는 슬하에 자녀가 없던 연로하신 분께 구태여 알릴 필요까진 없겠다 싶어 혼자 전시회 관람을 하기로 작정했다.

 70년대 말에 이미 머나먼 이국땅에서 수차례 작품발표를 해 호평을 받았던 흔적이 전시도록과 포스터로 남아 있었다. 같은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아서 인지 중학생 때의 그림들은 마치 내 그림처럼 비쳐져 왠지 모를 감회에 젖게 했다. 전시장 입구 탁자에 놓인 화집에는 시대별로 정리된 각각의 작품 유형들이 파노라마처럼 전개되고, 간략하게 요약된 눈부신 이력이 낯익은 앨범처럼 펼쳐졌다.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은 선생님께 선배 안부를 여쭈웠던 그때보다 훨씬 전이었다. 여러 해 전 이미 서울에서의 유작전 기록을 보고서야 오래 전에 안타깝게도 세상을 하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사진으로 보는 그의 얼굴은 중학생 때 처음 봤던 모습과는 달랐다. 안경 너머로 옛 얼굴이 어렴풋이 떠오르지만 몸집은 훨씬 우람하였다. 요즘 그린 것 같은 학창시절 데생과 수채화는 중학교 때의 추억을 되살리기에 충분했고, 뿌리고 붙이고 긁은 새로운 기법의 조형작품들은 나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다양하게 모색했던 치열한 창조의 흔적이었다. 온 세상 동식물을 보여주듯 다양하면서도 모양과 색깔과 질감이 서로 다른 각양각색의 비구상작품들이었다.

인쇄된 일기문과 서간문을 보니 그는 십년 가까이 외국에 체류하며 예술과 교육에 정열을 불태웠었다. 떨어져 살았기에 가족 특히 자녀들 생각에 애달파 하였으며, 간절하고 진정어린 편지를 주고받았나 보다. 한창 일할 중년의 시기였으니 자녀들이 훌륭히 성장하기를 갈망하는 어버이 마음 오죽했을까 싶었다. 그런데 관람 도중 어느 한 곳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李00 君 卽見’이란 편지 두 통 앞에서 한참 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출국 전의 대학 제자에게 보낸 편지인 듯했다. 동아리 통솔과 전시회 준비에 관한 문의에 자상한 상담과 그림까지 곁들여 충고한 답장이었다. 윗부분에 쓰인 ‘卽見’에 시선이 멈춘 순간 옛날 선배의 답장 받고 한없이 감동했던 나 자신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여 가쁜 숨만 몰아쉴 뿐이었다.

 80년대 말 귀국해 안정된 생활을 하려는 참에 과격파 학생들의 소요사태가 있었던 모양이다. 과중한 업무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감당하지 못할 지경으로 압박했단다. 갑자기 쓰러져 뇌수술을 받고 호전되는 듯했던 그가 그길로 바람같이 세상을 떠났다니 그 짧기만 한 일생이 너무 허망스럽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 뿐이다. 나는 국내에 있으면서도 저 세상 사람이 된 줄 한참 모르고 있었으니 죄인이 따로 없다. 일거수일투족이 묻어나는 유작과 유품을 보면 독실한 종교인으로 어려울 때마다 신에게 의지한 듯 했다. 지금껏 개인전 도록을 구입한 적이 없었지만 존경하는 선배의 일생 업적과 예술혼이 담긴 빛나는 작품도록을 본 순간 정성어린 마음으로 사서는 차에 치인 듯 술에 취한 듯 하릴없이 발길을 돌릴 뿐이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했던가? 세월은 휑하니 달려가 여러 해가 바뀌고 또다시 처서가 코앞이다. 인생이 짧을수록 예술은 더욱 더 길었으면 하는 염원 하나 감싸 안고 무언가에 확 찢겨진 것 같은 텅 빈 두뇌로 고인의 작품전시장을 나섰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또 그런 가을이다. 나와 선배를 이어주신 선생님 춘추 이제 망백이다. 올해는 여름추석이라 할 만큼 한가위가 일찍 닥친다. 지금도 얼마간 건강하시다면 선생님 뵙고 애달픈 그 선배에 대해 다시 여쭈어봐야지. 물론 지금은 아시겠지. 아니, 소식 끊기고 오래돼 모르실지도 모르지. 만약에 모르고 계신다면 고인이 된 선배의 안부가 오히려 충격은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