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적(符籍)과도 같은
이 장 희
옷이라면 벗어 뒤집어보이련만 가슴 속 응어리를 어루만져 줄 이가 있을까. 느닷없이 누군가 창문을 열듯 내 속을 열어보더니 말을 건넨다. "저 속에 어렴풋이 드러나는 흔적은 뭐냐? 아프지 않으냐?"라고. 그를 향해 뭐라고 대답하려다가 눈을 번쩍 떠보니 맹랑한 꿈이다.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지고 말았던 흔적이 손톱자국처럼 뚜렷하다.
이른 장마라더니 어지간히 길기도 했다. 끝나기 무섭게 불길 같은 더위가 삼킬 듯 혀를 날름거렸다. 두 해 연이어 학생간부수련회 인솔 팀의 동참을 권유 받아 동승했다. 래프팅 체험학습이 무르익으려던 참에 여든 명 중 한 아이가 사고를 당했다. 막막한 느낌의 크기는 하나를 넘는 무한의 숫자였다 . 왜 사고가 나기 전 어떤 낌새를 감지하지 못했던가. 어떻게 아무도 모를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단 말인가. 허둥대며 소리쳐 구조를 청할 수도 없었을까. 혼백의 그림자로만 남은 피지 못한 꽃봉오리는 얼굴 맞대고 살아온 부모 형제 한 번 불러보지 못한 채 저 세상을 향했다.
그날은 학생간부 수련회 둘째 날이었다. 일정에 따라 수련원의 위임을 받은 업체 주관 체험활동이었다. 주의사항에 준비체조가 이어졌다. 구명조끼도 입었고 안전요원 여럿이 딸렸다. 간혹 스치고 지나가며 들이받는 짓조차 흥미롭고 색다른 물놀이였다. 시장기가 돌 무렵 어떤 보트가 서로 슬쩍 부딪히며 스치던 보트의 학생들까지 이탈하는 사단이 일어났다. 부랴부랴 보이는 족족 낚아채었기에 위급 상황은 수습 되는 듯했다. 그러나 그 아이는 모두의 시선에서 한걸음 멀어져 있었는지 물살과 함께 귀신도 모르게 물위로 솟구치자마자 사라졌다.
학생 명단을 일일이 대조해 딱 하나 모자란다고 눈치 챈 바로 그 시각, 그 얘는 꼭꼭 숨은 물풀이었다. 주변을 샅샅이 체크해도 소득이 없었다. 모두를 불러 모아 거듭 확인해도 소용이 없었다. 한두 해 전 내게 배운 아이였다. 엄연히 등록된 자격을 갖춘 유명 업체였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아무 일 없다는 듯 강물은 유유히 흐르는데 모두가 망연자실했다. 시간은 구름처럼 흘렀고 찾는 데 한계를 느껴 수색을 포기하고 곳곳에 보고했다. 인솔책임자의 무거운 한숨이 땅이 꺼질듯 허망하게 귓전을 울렸다. 학교장과 담임교사, 사고 당한 가정에 급히 알렸다. 사고경위를 전하면서 인솔자들 모두는 제 정신을 송두리째 귀양 보낸 후였다.
그 애 가족과 담임교사들도 비슷한 시각에 황망히 도착했다. 한 송이 연꽃이 졸지에 물속으로 사라져도 몰랐던 넋 잃은 우리 곁으로 차례차례 다가왔다. 몽당연필처럼 짧은 오후의 노을은 짙어갔다. 길 가던 사람들이 무슨 구경거리인양 차를 세우고 기웃거리니 금방 장사진을 이루고 말았다. 사망사건의 중심에 서있는 게 너무 부끄러워 도로변의 구경꾼들을 죄다 어딘가에 쓸어 담고 싶었다. 그 얘의 육신은 얼마나 찾기 힘들었던지 전문잠수부를 불러야 했다. 있을 만한 곳을 점치고도 애타도록 초조하게 지켜본 후에야 물 밖으로 끌어올려졌다. 가족이 도착하기도 전에 싸늘한 주검이었다.
입은 있어도 말은 없었다. 하늘도 산천도 무심했다. 서둘러 도착한 담임교사들은 어쩌다 이런 끔찍한 꼴을 보게 되는지 울며불며 안타까워했다. 학교장과 인솔교사 모두 죽고 싶은 심경이지만 꿇어앉아 유족 앞에 목이라도 내놓을 듯 죽을죄를 지었다고 거듭 되뇔 수밖에 없었다. 선생 신분이 아니라면 모두 주먹과 발길질에 넝마처럼 내팽개쳐졌을지도 모른다. 이 무슨 악연인지 우리 편이 아무도 없어 새파랗게 겁에 질렸다.
시신 앞에서 울부짖던 유가족들이 거세게 대들었다. "왜 비 온 후에 수련회냐, 다른 곳이 없어 예까지 왔나, 보험엔 들었나, 자격 갖춘 안전요원 맞나?" 미주알고주알 따졌다. 수련원과 행사주관업체 실수는 아닌지 의혹을 죄다 쏟아내고 퍼부었다. 유가족은 낯선 곳에서 졸지에 피붙이를 잃게 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밤이 깊어지기 전에 학생들을 버스에 태우고 출발할 임시담임이 나였다. 뒤처리와 수습을 위해 책임질 사람만 남았다. 저승길도 벗이 있으면 수월하다는데 고인에 대한 연민과 자책감으로 파김치 되어 돌아가니 한 마디 대화도 지시도 할 수 없는 허망한 신세였다.
다음날 숨 돌릴 틈 없이 밤이 이슥하도록 대책을 모색했다. 유가족의 요구조건을 듣고 최대한 들어주려고 애썼다. 나라에 큰 공을 한 이의 장례에서나 봤던 리무진 승용차를 불러라, 전교생이 모이는 학교장으로 명복을 빌어 달라, 보험금 말고도 너끈한 배상금을 내놓으라고 닦달했다. 변호사나 학교안전협의회 규정도 도움의 손길을 벗어나 있었다. 기념비 세워달라는 요구 빼고는 죄다 수용하는 선에서 합의는 이뤄졌다. 장례식이 11시라고 알려온 시각이 02시경이었다.
전에 없던 큰일을 치르기 위해 學校葬 절차에 따른 원고는 혼자 교무실에서 밤새워 만들어야 했다. 일반 장례절차를 찾아 눈에 불을 켜고 해부하다시피 훑은 끝에 동이 튼지 한참 후에서야 짜깁기로 문안을 얽었다. 밤잠도 식사도 도둑맞은 채 시간은 마귀의 발톱처럼 성큼 다가와 있었다. 범접할 수 없는 유가족과 전쟁이라도 치르는 심정으로 식장을 향했다.
學校葬을 알리는 개식사에 이어 국민의례 다음 유족대표의 시신 안치 차례였다. 입구에서 유가족 중 누군가 슬픔에 겨워 쓰러지니 장내는 적막강산이었다. 아이의 어머니였다. 사회를 맡은 나는 초장부터 탈을 만났지만 총망하게 돌아다닐 수도 없고 진땀이 빠작빠작 흘렀다. 상황설명 해주는 사람은 없고 칠흑 같은 침묵은 호흡곤란 중환자처럼 갑갑했다. 매연 보다 매캐한 정적이 엄습하며 긴 여운이 그늘을 드리웠다. 이어진 학교장 弔辭는 으등그러진 눈물이요, 대표학생의 추모사는 퉁퉁 부은 흐느낌이었다. 또 한 번쯤 유가족들의 팽개질이 있을 것 같던 불안은 기우였다. 장례식은 계획대로 무리 없이 진행돼 차질없이 끝냈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교육청은 하루에도 몇 번씩 사고경위를 캐묻고는, 보고가 미흡하다, 육하원칙에 따라 상세히 써 보내라 하니 우리를 감싸줄 천사인지 괴롭힐 사탄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수 없이 보고했지만 인솔자 각각 어디서 뭘 했는지 시간별로 이 잡듯 꼼꼼히 적으라는 지시도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사고경위 보고에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교육청에 오라는 대로 갔고 며칠 새 이사해버린 유족의 집을 수소문 끝에 알아내었다.
담임을 앞세워 조문차 찾아간 날 조심스레 들어서는 찰나였다. 원망으로 한 맺힌 아우성이 들렸다. 입이 열인들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누나 살려내! 이 ×새끼들아.” 동생이 울부짖으며 욕설을 퍼부을 때 누나는 이런 동생을 말릴 수도 없는 혼백이 아니던가.
보험금 1억 원, 수련원과 주관업체의 조위금, 교사 학생 성금을 전달했다. 유가족은 천만 원 더 달라, 또 오백만원 더 보태라고 바투 바투 할퀴고 긁었다. 꽤나 원망스럽다 싶었지만 그래도 상대방 유족 입장에서 헤아리면 감내할만 했다. 인솔자들은 한 번 더 목돈을 모아 그들이 요구한 액수만큼 채워 건넸다.
끝나는가 싶었지만 외할머니와 이모가 앞장서 팔소매를 걷고 교장실 항의를 벌이는가 하면, 죽은 학생 대신 수업을 받겠다며 교실에 버티고 앉아 침묵시위도 벌였다. 열흘이 넘도록 이어져 입시준비에 바쁜 학생들도 교사들도 이산가족의 아픔만큼 쓰라린 경험들을 겪었다.
가까운 절에서 고인의 넋을 위로하는 四十九齋를 지내겠다고 했다. 평생 가슴에 묻고 살겠다던 인솔책임자와 함께 참배한 건 시기적으로 적절했었다. 그래서인지 분위기가 곧 반전되었다. 시위하던 때와는 다른 모습으로 외할머니가 찾아왔다. 늙은이가 어리석게 잘못 판단해 심려를 끼쳤으니 용서하시라며 교장실로 음료수를 가져왔다. 절에서 스님 설법을 듣고 무지에서 깨어났다고 했다. 아집에 휩싸여 해오던 그동안의 시위를 더 이상 않겠다고 하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 전날 꼬박 밤을 새웠고 방학이지만 낮잠은 싫었다. 장례도 치렀고 열흘 전부터 염두에 두고도 이번 일로 미뤘던 개인적인 일이 숙제처럼 떠올랐다. 아내의 만류도 괘념하지 않고 백리 길을 향해 차를 몰았다. 충격에서 만사를 잊고 싶었다. 횡단보도 앞을 지나던 몇 초 전까지 옆자리 아내와 말을 주고받았다. 아내에게 걸려온 전화 대화도 들렸다.
아뿔싸! 쾅 소리에 비로소 소스라치게 놀라 눈 떴을 때는 이미 핸들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슬처럼 내리는 졸음에 몽중운전이라니. 연이어 나타난 정지선에서 기다리던 앞 차 꽁무니를 들이받은 것이다. 다친 건 약과였고 손해배상을 해줘야 했다. 몇 초 더 깜빡했다면 객지의 두 아들까지 고아로 만들었을 아찔한 실수였다. 두 번 다시 보이기 싫은 창피하게 구겨진 자화상이었다. 낡고 자그마한 나의 차도 그 아이 장례 치렀던 바로 그날 볼품사나운 몰골로 수명을 다했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눈 좀 붙이라는 아내의 권유를 무시한 처사가 한스럽다. 바로 그 시각 차가운 흙속으로 사라진 그 아이가 내게 가스 불꽃보다 강렬하고 살을 태우는 냄새보다 역한 위험신호를 보냈는데도 마이동풍으로 흘려보냈는지 모른다. 일을 마무리했다고 마음 놓고 있다가 또 다른 변고가 도사리고 있는 줄 예상하지 못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시시때때로 바스러진 내 기억 속 편린을 느닷없이 스쳐 가는 그 아이의 비극은 내 가슴 속 깊은 곳의 부적(符籍)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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